DAILY BREAD · 스바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노래

스바냐 3장 1–20절
DAILY BREAD · 스바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노래
스바냐 3:1–20
오늘의 본문

무너진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경고 속에서도, 하나님은 순결한 입술과 영적 가난함으로 여호와만 의지하는 남은 자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향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잠잠히 사랑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WORD STUDY
יַחֲרִישׁ בְּאַהֲבָתוֹ · יָשִׂישׂ · יָגִיל
야하리쉬 베아하바토 · 야시스 · 야길
야하리쉬 베아하바토(그의 사랑 안에서 안식함), 야시스·야길(벅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소리치며 춤추고 기뻐함).
삶의 적용
나는 세상의 바벨탑을 내려놓고 영적인 남은 자(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로 엎드려 있습니까? 나를 보며 기쁨에 겨워 춤추시는 하나님의 잠잠한 사랑의 시선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서론: 절망스러운 세상, 그리고 스바냐의 경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를 보면 마음이 참 답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정치적인 갈등, 경제적인 위기,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들, 그리고 때로는 교회의 가슴 아픈 소식들까지 들려옵니다. 세상을 보면 과연 소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둡고 패역한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일 삶의 터전에서 느끼는 이 무거운 감정은, 기원전 7세기 후반 유다 왕국을 바라보던 선지자 스바냐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바냐서는 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무섭고 철저한 심판의 메시지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얼마나 섬뜩한 말씀입니까? 타락할 대로 타락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대청소'를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결코 심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면 가장 찬란한 아침이 오듯, 구약에서 가장 끔찍한 심판의 언어로 시작했던 스바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3장에 이르러 성경 전체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 노래'로 마무리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타락한 세상을 향한 '질책', 그 속에서 건져내실 남은 자들을 향한 '회복',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 스바냐 3장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근심을 덮고도 남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무너진 예루살렘과 신실하신 하나님 (1–8절)

본문 1절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의 실상을 세 가지 단어로 고발합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1절)

이 단어들의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모레아(מֹרְאָה, 패역하고)입니다. 이는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고의적이고 완강하게 삿대질하며 반항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니그알라(נִגְאָלָה, 더러운 곳)입니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우상숭배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가증하게 오염시켰다는 것입니다.

셋째, 요나(יוֹנָה, 포학한)입니다. 이는 누군가를 맹렬히 압제한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할 예루살렘이 도리어 그들을 짓밟고 착취했습니다.

특별히 사회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의 타락은 참담했습니다. 정치를 책임지는 방백과 재판장들은 백성을 지키기는커녕, 먹이를 찾는 '부르짖는 사자'와 밤새 뼈까지 갉아먹는 '저녁 이리'처럼 자신의 배만 불렸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선지자들은 얄팍한 이익을 위해 교만하게 거짓 평안을 외쳤고,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총체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니 더 나아가 영적 지도자라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의 은밀한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 삶의 주인을 여전히 나로 삼고 고집을 부리는 '패역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더러움'은 없습니까? 나보다 약한 사람, 내 직장의 부하 직원이나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포학함'은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절을 보십시오. 지도자들의 악함과 완벽하게 대조되는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5절)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듯, 하나님은 어김없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공의와 사랑을 비추셨습니다. 돌아오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말씀을 주시고, 때로는 징계의 매를 드시며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수치를 모르고 부지런히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열국을 향한 맹렬한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그런데 8절에서 하나님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לָכֵן חַכּוּ־לִי, 라켄 학쿠 리) (8절)

여기서 '기다리라'는 절망 속에 주저앉아 심판의 매를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심판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들이 다 불타 없어지고 나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 것이니 "나를 신뢰하고, 소망을 품고 기다리라"는 초청입니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 입술의 변화와 거룩한 남은 자 (9–13절)

그렇다면 심판 이후,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실 회복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회복의 첫 단추로 '입술의 변화'를 꼽으십니다.

9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니까? 과거 창세기 바벨탑 사건 때, 인류는 한 입술로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언어가 혼잡해져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의 날에는, 흩어졌던 열방이 깨끗해진 하나의 입술로 연합하여 어깨동무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회복된다는 것은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증거입니다. 불평과 원망, 남을 비방하고 상처 주던 포학한 입술이,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살리는 순결한 입술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을 12절은 이렇게 부릅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2절)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잘나고 권력 있는 자들이 아니라,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עָנִי וָדָל, 아니 웨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이 말은 단지 통장에 잔고가 없고 가난해야만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함은 '영적인 파산 선고'를 의미합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내 커리어와 재산을 의지하려 합니다.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러나 참된 남은 자는 교만이 산산이 깨어지고, "하나님, 저는 주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라고 엎드리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볼품없어 보여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피난처로 삼고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이 '영적인 남은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힘을 빼고 주님만 의지할 때, 13절의 말씀처럼 우리 삶에 놀랄 일 없이 평안히 누워 쉬게 되는 진정한 샬롬(שָׁלוֹם)이 임할 것입니다.

3. 구원하시는 용사, 기뻐하시는 하나님 (14–20절)

자, 이제 스바냐서의 절정이자 성경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구원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14절에서 선지자는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예루살렘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외칩니다.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합니까?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 한가운데 친히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는 세상을 진멸하러 오시는 무서운 '전쟁의 용사'였던 하나님이, 17절에 이르러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구원하시는 용사(a mighty Man to save)'로 그 모습을 바꾸십니다.

우리 다 함께 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라 생각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7절)

성도 여러분, 이 구절에 쓰인 히브리어 단어들의 본래 의미를 알면 우리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신다"(יַחֲרִישׁ בְּאַהֲבָתוֹ, 야하리쉬 베아하바토)고 합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신다'는 뜻입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기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바라만 봅니다. 그 사랑에 스스로 깊이 빠져들어, 무한한 만족과 평온함을 누립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실수 투성이고 연약한 여러분을 품에 안고 "너는 내 사랑이다. 내가 너로 인해 참 평안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יָשִׂישׂ 야시스 / יָגִיל 야길)고 합니다. 이 '야시스'와 '야길'이라는 단어는 속으로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벅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밖으로 소리치며, 빙글빙글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뜻하는 아주 역동적인 단어입니다.

세상의 어느 신이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을 향해 이렇게 기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까? 거짓말쟁이고, 이기적이고, 수없이 넘어졌던 우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는, "이제 너는 내 거룩한 신부다!" 하시며 잃은 양을 찾은 목자처럼 춤을 추시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대단하게 헌신해서가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패하여 찢긴 가슴을 안고 이 자리에 나아왔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엎드리는 그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며 벅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십니다. "네가 나의 가장 큰 자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구원하시는 전능자의 사랑 안에서 일어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짐이 무겁고, 반복되는 죄악과 실패로 인해 스스로가 실망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오늘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 뒤에는 우리를 살리시려는 맹렬한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헛된 바벨탑을 부수고, 곤고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만 의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세상을 살아가실 때, 내 곁에 계신 '구원하시는 전능자'를 기억하십시오. 나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을 추시는 그 아버지의 시선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십시오.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상처와 수치를 씻어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노래"
나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을 추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참된 안식과 회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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